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커티스 르메이 (문단 편집) === 지나친 강경함 === 그의 성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전선 지휘관으로선 권장할 덕목일지언정 말 한마디로 도시 하나, 국민 수만명이 폭탄밥이 되는걸 결정해야하는 '''수뇌부로선 반드시 금기시해야 할 성향'''이었다. 르메이의 철저한 목표 지향적 전쟁관은 특히 그가 활약했던 역사상 최악의 [[총력전]]인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유효한 수단이었다. 그 당시는 전세계가 전쟁에 미쳐 제정신이 아닌 통제불능 수준으로 처절한 전쟁을 겪고 있었고, 어떠한 정치적 부담을 떠안더라도 일단 전략목표를 달성하는게 우선인 상황이었는데, 그걸 확실히 달성한게 르메이 장군이었다. 실제로 [[도쿄 대공습]]을 비롯한 [[일본 본토 공습]]으로 일본 제국을 붕괴시킨 것, 유럽 전선의 연합군 전략 폭격 등으로 충분히 증명했다. 문제는 전쟁이 극단적으로 치닫고 이성이 마비된 총력전에나 유효했던 전략을 전쟁이 끝나고 전세계가 만신창이가 되고 난 후에도, 재발과 확전의 여지를 남긴 채 살얼음판 위에서 유지되던 '''[[냉전]] 시기에도 끝없이 주장한 것'''이다. 상술한대로 이미 전쟁이 벌어진 상황이라면 어차피 싸움을 피할 수 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적을 밀어버리자는 르메이의 주장은 (윤리적인 문제를 포함해 지적할 부분이 없진 않겠으나) 일단 고려해볼 여지도 충분히 있었다. 또한 '전선 지휘관'으로서는 애초에 그 종전 이후의 책임 문제는 상부에게 떠넘기고 본인은 직책 그대로 해당 전선의 승전만 생각해도 되기 때문에 직책을 볼 때 책임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보기도 힘들다. 냉정히 말해 그때 루즈벨트, 미국 합참과 그의 상관인 [[헨리 아놀드]]는 어찌 됐던 부담되는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 양면 전쟁을 4년 이상 끌어왔고 각자의 정치적 목표와 셈법에 따라 생존을 도모해야 했기 때문에 이성보다는 어떻게든 빨리 전쟁부터 끝내야 했다. 애초에 명분은 [[나치 독일]]과 [[일본군]]의 파시즘과 그들의 점령지에서 보여주는 잔혹함 때문에 미국이 쥐고 있어서 어떤 강경책을 써도 정치적 부담도 덜했고. 하지만 냉전 시기가 된 뒤에도, 심지어 그의 위치가 일개 전선 사령관이 아닌 '''전략 공군 사령관 또는 공군 참모총장'''이라는 다수의 전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고위직이 된 후에도 르메이의 이런 주장이 계속 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직위에 따라 응당 관점과 전략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음에도 르메이는 '전시 사령관'으로서의 방침을 그대로 고집했다. 이 문제가 터진 대표적인 사태가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였는데, 르메이가 쿠바의 소식을 듣고 한 말이 다름 아닌 '''"쿠바를 폭격으로 밀어버리고 소련과 핵전쟁을 시작하자."'''였다. 일개 사령관도 아닌 진짜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위치의 인간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나라 하나 밀어버리고 개전하자고 선포한 것. 합참의장이자 육군대장이었던 [[맥스웰 테일러]] 장군은 이에 반발하며 쿠바를 봉쇄해 고립하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르메이는 "어차피 소련은 전쟁을 일으킬 놈들이니 그냥 우리가 선수 치자"였고 테일러는 정반대로 "소련도 변해가는 국제 정세에 맞춰 '(사회적인)신뢰'를 완전히 무시하고 독단 행동하긴 힘들어질텐데 굳이 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라고 주장한 것인데, 당연하지만 이 시대의 2대 강국이자 주축이었던 게 소련과 미국임을 고려하면 르메이의 이런 주장은 국가 간의 전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실상 '''[[3차 세계대전]]'''이 될 여지가 충분했다. 당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도 3차 세계대전 발발을 우려해 맥스웰 테일러 장군의 손을 들어줬다. 이는 커티스 르메이가 전쟁터에 있었던 1940년대 미군 육군 항공대의 상황과도 직결된다. 이미 1918년에 영국에서 공군이 창설되고, 빌리 미첼,아이라 이커 등 항공기의 중요성을 역설하던 육군 출신 장교들이 점차 목소리를 높이던 '''미국 육군 항공대의 독립 후 공군 전환'''은 1940년대쯤에는 반쯤 실현되어, [[헨리 아놀드]]가 사실상 공군 대장의 역할로 리히, 마셜, 킹과 함께 합참에서 대전략을 논의하는 정도까지 발전했고 그 시점에서 필요했던 것은 아직까지는 허황된 주장에 가까웠던 공군 만능론, 폭격기 만능론 같은 정치적 주장을 실제 결과로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는 꼭 르메이가 아니라 당시 육군 항공대 엘리트인 헤이우드 한셀 등의 폭격기 마피아들이 주장했던 것이고, 당시 영국 공군이 유럽 전선에서 시행하던 전략 폭격이라는 작전이 공군의 미래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당시 태평양 전역의 상황과 맞물려, 전략 폭격만 제대로 성공시키면 육군 항공대의 독립을 실현시킬 수 있고, '''앞으로 공군이 현대전의 주역이 된다라는 거대한 야망을 실현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략 폭격을 성공시키기 위해 적국 민간인의 목숨 따위 얼마든지 지울 수 있다는 냉혹함이 앞섰고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고 도쿄 대공습으로 끝내 방점을 찍은 것이 커티스 르메이였다. 르메이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대비하여 발탁된 인물이고, 그를 발탁한 인물들에게는 그의 강경론을 통제할 자신이 있었으며, 실제로 통제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비상사태에 편향된 극단성을 보이는 인물을 발탁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의 군사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권에 관여하는 인물 중 하나가 지나친 극단성을 보이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 시스템적으로 그런 문제를 보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해당 인물 자체를 평가할 때에는 그런 문제가 없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 상술했지만, 이미 르메이의 1차 목표는 미 공군의 독립과 전략 폭격의 의미를 실현한 점에서 끝났다. 필요 없는 민간인의 피를 흘리지 않아도 정치적 목표를 이룬 입장에서 과거의 반복은 제정신이 있다면 하면 안됐다. 또한 르메이의 호전성은 전시에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전시를 평시로 되돌릴 수 있는' 덕목이지만 평시에서는 오히려 평시를 전시로 바꾸는 악으로 발휘된다. 이 시기 르메이가 호전론을 주장했던 많은 위기들을 미국은 전쟁이 아닌 다른 대안으로 해결했다. 르메이는 다른 대안이 있는 상태에서 전쟁을 주장하는 실수를 여러 번 저질렀다. 그가 전략 공군 사령관이나 공참총장으로 활약했던 냉전기는 본질적으로 '[[상호확증파괴|공포에 기반한 평화]]'의 시기였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다 죽는다는 공포가 서로를 극단적으로 적대하는 양 진영 사이에서 직접적인 충돌이 벌어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막고 있던 시대였다. 르메이는 툭하면 핵 폭격을 주장한 것으로 악명 높은데, 그의 맞은 편에 있던 소련의 정치인이나 군 수뇌부 중에서도 미국에 선제 핵 공격을 주장한 이는 거의 없었다. 소련은 모순적인 체제를 가진 국가였지만,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과 같은 군국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안드로포프가 집권하기 이전까지, 구성원의 태반이 참전자거나 전쟁을 경험했던 소련 수뇌부는 냉전 시기 내내 중요한 고비마다 핵전쟁을 회피하기 위하여 애썼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경우에는 흐루쇼프의 '즉흥성'이 작용한 경우로서 흐루쇼프를 제외한 정치국 위원들은 안 해도 될 일을 벌여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다며 흐루쇼프를 강경하게 비판했다. 서로에 대한 극단적 불신과 적개심이 팽배했던 이 시대에조차 '적들이 우리에게 핵 공격을 가할 테니 이에 대해 보복할 핵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하여 상대의 선제 핵 공격으로 자국의 지휘부가 붕괴될 경우 무인 시스템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적을 파멸시킬 [[지구 최후의 날 기계|수단]]을 마련할지언정 '우리가 먼저 핵 공격을 가하자' 고 주장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르메이는 이런 위험한 시대에 '선제 핵공격' 을 주장한 드문 인물 중 하나였다. 르메이의 한계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잘 드러난다. 르메이 본인도 설마 인류의 파멸을 바라고 그런 극단론을 주장한 것은 아닐 테고, 본인으로써는 선제 공격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기에 주장한 것이겠지만... 해당 위기의 전개와 결과를 생각해 보면 르메이가 충분히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무모한 강경책을 주장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르메이의 강경책은 기본적으로 '소련이 미국과의 핵 전력 격차를 좁혀오는 상황에서, 전면 핵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더 이상 격차가 좁혀지기 이전에 선제 핵 공격을 통하여 핵전쟁에서 승리해 버리는 것이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라는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전면적인 핵전쟁은 피할 수 있었고, 만에 하나 핵전쟁이 발발했을 시의 피해는 최소화하더라도 감당하기 지극히 어려운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SLBM와 ICBM을 보유하여 미국을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엄청난 수준의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능력은 있었다. 르메이 자신도 1985년 인터뷰의 내용을 보면 이 점을 결국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폭격에 나서기 전에 항상 조종사들과 승무원들에게 [[국가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설교를 하곤 했는데, 민간 지역 폭격으로 [[PTSD]]를 앓게 된 장병들이 극도의 자극을 받아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육군 항공대의 [[군무이탈]]이 꽤나 많았다고 한다. 언론과 대중들은 그를 전쟁 대스타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의 밑에서 일했던 일선 장병들은 그의 혹독한 스케줄링과 무자비한 작전진행에 대한 후유증으로 그를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 군부에서 초강경파를 대표하던 인물이었고, 상관 앞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던 타입이라 다른 사람들과 갈등도 잦았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며 케네디 대통령에게 모욕을 준 일화는 유명하며, 케네디 대통령이 없는 자리에서도 걸핏하면 다른 장군들을 모아 놓고 [[뒷다마]]를 까기 일쑤였다. 또한 쿠바 미사일 위기가 무사히 끝나고 케네디 대통령이 군 장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회동을 주선했을 때는 대통령 면전에서 미사일 위기 당시에 내린 결정 사항들을 비난하고 쿠바를 폭격해야 했었다며 악다구니를 썼다. 일개 참모총장 따위가 군 통수권자를 모욕하고 조국은 물론, 세계를 멸망시킬 뻔 했으면서 뻔뻔하게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다. 르메이의 이러한 모습은 강직함이나 솔직함 보다는 광기에 가까워 보인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로버트 맥나마라]]의 갈등도 유명한데, 당시 유화적인 입장에 서 있던 맥나마라 장관에게 모욕적인 표현 역시 서슴지 않았다. 소련과의 전쟁 시나리오를 의논하던 도중 맥나마라 장관이 "소련 인민들을 최대한 죽이지 않고 소련 미사일 기지를 일시에 파괴할 수는 없을까?" 라고 묻자 르메이는 "장관님. 당신 미친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하기도 했고 "미국 국방부 장관이 흐루쇼프였여도 지금보다 낫겠다." 식의 비아냥거리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을 정도.[* 출처: 마이클 돕스 1962] 정작 르메이의 '소련을 밟아 없애버리자'라는 사상은 소련이 제대로 핵 무장도 하지 못하고 [[나치 독일]]에 의해 그나마 풍요로웠던 서부가 쑥대밭이 된 데다 수천만이 희생당하고 [[독소전쟁]] 때문에 공업 구조가 군사적 목적의 중공업에 치우쳐 경공업, 군수에서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고[* 군수와 경공업 미비 문제는 매우 고질적이고 끈질기게 [[소련군]]을 괴롭혀서 소련 해체까지 소련군은 결코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소련 점령지의 정리가 끝나지 않은 1945 ~ 1950년이 가장 적기였고 미국에게 유리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물론 막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해서 싸운 소련을 아무 명분도 없이 갑자기 칠 수는 없었겠지만. 외교적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국내에서 전쟁의지가 필요한데 미국 내의 반공정서는 아직 부족한 상황이었다. 반공정서를 더욱 높여준 6.25 전쟁에서도 미국민들은 3차 세계대전이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굳이 르메이 장군을 변호해주자면 이런 강경파가 있어야만 '''협상력이 유리'''해지는 외교적 문제도 있다. [[http://sonnet.egloos.com/4007349|#]] 굳이 상부에서 자기들과 성격이 전혀 반대인 강경파를 올려준 건 이런 요소도 있을듯. 또한 르메이는 위의 일본 비행장 공습 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자기 생각과 맞지 않더라도 어쨌든 일단 임무를 받았다면 착실하게 수행하는 유형의 지휘관이었다. 즉 르메이가 개인적인 가치관이 강경파이고 그것을 대단히 적극적으로 표현하긴 했어도, 그것과 별개로 어쨌든 지시에는 군말없이 따르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상부의 온건파 인사들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안심(?)하고 기용할 수 있었던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